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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Leben

하등의 이유

이방인 읽은 그 다음날

아침에 앉아서 생각나는 대로 정신없이 휘갈긴 글
정리하기 귀찮아서 그냥 올린다.
내가 나중에 다시 읽을때도 흐름이 이어지지 않아
그 연결고리를 찾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그런 글

어떤 하등의 이유도 찾지 않는 또는 못한 뫼르소 (아직까지 그게 그의 의도가 담겨있는지는 가늠하지 못 하겠다)
1부까지 이해 해 본 그의 행동의 가치는 모두 동일하다. 결혼, 사랑을 묻는 마리의 물음에도 그 어떠한 것도 상관없고, 마리가 원하기 때문에 결혼을 해도 되고, 아무렴 좋다는 것이다.
사랑하느냐는 물음에도,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레몽에게도, 늙고 병든 개를 키우는 늙은 노파와의 대화에도,, 여자친구인 마리와 헤어지고 식당에서 앞에 앉은 찰나의 순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여자에게 느끼는 또는 자연적으로 반응 된 짧은 끌림에도,,
나의 생각은 그가 무게감이 없다기 보다, 차라리 순간에 강렬했고, 그 순간에 존재하는 사람 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떠나간 것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이 필요함과 동시에,, 그 단점을 이야기 하자면 현재의 순간에서 하등의 이유를 찾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비교를 하게 되니까. 올바른 비교 방법이라고 한다면, 과거를 현재에 접목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과거와 비교시키는 것이다. 비교우위를 바꾸자는 말이다. 현재에 중요성을 두고 나아가는(이동하는) 존재로서, 연속하는, 이어지는 시간으로 현재와 과거를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하등의 이유를 찾게되는 순간..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두려움, 불안과 동시에 현재를 마주하며 산다는 욕구가 무색 해 질 정도로 현재를 등한시하게 될테니까.
다시한번 실존주의자 였던 카뮈의 책을 읽으며 생각이 든 것은
실존한다는 것은, 즉 나의 선택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주어지는 시튜아시옹(상황) 속에서 절망과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반항하는 자.
실존적 선택을 함으로 이동하는 자. 곧 살아있는 자.

재판장에서도, 그가 이전에 감옥에 갇히기 전에 살았단 모습과(1부에서의 모습) 다름없이. 사람에게 끌리는 매력, 그 찰나의 순간에 반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순간을 사는 사람, 순간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총을 쏜 이유,, 이동을, 휴식을. 나의 반항을 가로막았던, 현기증이 나도록 뜨거웠던 그 태양. 바로 그 태양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왜냐면, 나의 지금 가장 큰 열정, 나의 이동, 나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방해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를 찌르던 그 태양. 나의 이마를 겨냥하던 그 태양. 나의 나 다움을 막는 모든 부조리한 것들. 나를 온전히 가만두지 않는 여러 관습들에 대한 역겨움과 뜨거움, 따가움까지.
그 속에서 평온한 바다의 침묵을 깼던 것이다!

왜 이방인 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재판장에서 조차.. 회색재킷, 플란넬 넥타이를 한 남성기자와, 1부에서 음식점에서 만난 로봇과 같은 여자까지. 나를 위하여 온 여자친구인 마리보다 그들에게 눈길이 갔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피곤함에, 짜증남에, 성가심에, 일차적으로 드는 감정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 모습은 전혀 감정적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삶에 충실한 나아가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쉽게 화를 내지도 않고, 다른이를 존중하면서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다.
배려와 존중 가운데, 자신의 삶에 충실한 모습. 심지어 사람을 죽인 사실을 가진 그에게 동정심 따위의 흔한 감정을 넘어 죽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느껴질 정도다.
그는 아무이유 없지 않은 사람이었고, 오히려 그 이유들이 그리고 그에 기반한 행동들에서 일관성까지 비추어지기 때문에,, 그 일관성은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도 한다.

인간 도덕의 모럴.. 행동의 모럴을 어떻게 정의 해야 할까?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그 모럴들이 진리일까.
평가는 어떻게 해야하고, 더 나아가 선과악의 차이는.. 그 경계는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이 책에서 큰 맥이 되는 예심판사와 사형집행전 목사와의 만남.
예심판사와 사행집행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목사. 이 두사람과의 만남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뫼르소는 자신의 위치에 주눅들지 않았다. 범법자, 사람을 죽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 권위자(소설 속에 상대적으로 힘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는 두 사람)의 강요(이것을 강요라고 표현 할 수, 단언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랑과 온유가 아닌 분노와 성급으로 뫼르소를 대하고 있기 때문에 강요라고 느껴진다.) 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금. 절망적 이지 않는다. 그렇다, 뫼르소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시튜아시옹 속,, 실존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사유하는 사람, 실존적 존재, 반항하는 인간으로 보여진다.  절망속, 고통속에서 강한인간이다. 하지만, 약한 인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상황을 들여다 보는 독자인 나의 눈에는,, 그는 약함 에도 불구하고, 강한 생명으로 살아있다. 그의 살인에 정당성을 설득 당할정도로. 어떤 사실관계에 의한 정당성이 아닌,, 오로지 그의 삶에 대한 태도 만으로도.

즐거운 대화, 만남을 사랑(?) 했던 그는 예심판사와의 만남은 오히려 가족 같다고표현 할 정도로, 그와의 만남에 충실 했고 거짓없이 임하였다. 물론, 강요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그의 분노는 빼놓고서, 담담하게 대화를 이루어 가고, 흥미를 전혀 느끼지 않았던 목사와의 대화에서는 [피곤함] 만을 느낀다. 그저 그는 쉬고 싶은 것이다. 지금 현재 위치한 감옥보다 더 감옥같은 시간에서 부터. 곧 그는 목사로 부터 나를.. 나의이동을 방해를 느낀다. 어떤 무기같은,, 나를 찌르는 말씀을 들고와서. 태양이 나를 찌르던 만큼의 강렬함 까지는 아니지만, 얼마남지 않은 생, 부족한 시간 가운데 성가신 존재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목사인 그도 그의 입장에서 자신의 할 몫에 최선을 다 하고 있었으므로, 그 정당성, 그 존재를 인정 했기에 소설의 끝에 말로써 분노하는 모습 전까지, 그저 속으로만 피곤함을 주장 할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여겨지는 상황속에 있기 때문이다. 뫼르소를 목적으로 보지 않고 어떤 하나의 수단, 물질, 유물론적 관점에서 목사는 바라봤다고 나는 느꼈다. 기독교의 사상, 그 세계관으로 넘어가서 과연 창조론 에서 ‘인격’이 보장 받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온갖 정해지는 인간의 선한 모습 그 모럴, 어쩌면 본질을 먼저 이야기 하기때문에,, 그래서 뫼르소는 본질을 들이미는 그들의 모습에 싫증을 느꼈다. 그는 그저 사람이 먼저이고 목적이던 다른 이들과의 만남(레몽, 개 주인인 노파, 음심적 사장, 레몽의 친구들, 마리, 음식점에서 만난 여기자, 재판장에서 처음 본 멋진 수트를 입은 남성까지.) 을 소중히 그리고 충실히 여겼다. 

인간 본질에 반항하며, 내 존재를 찾아가며 드러내며,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을 추구하였다. 
결국 카뮈가 이야기를, 그 철학을 살았던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야할 시간이다.
내일은 다시 영어로 주말에 있었던일에 대해서 정리하고,
사르트르와 카뮈의 대화를 좀 더 집중해서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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