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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Leben

실존하는 존재


오늘, 이 시점. 이 순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유를 통해 기록 하고자 한다.

그렇다. 나는 아는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에대한 이해도, 삶에 대한, 세상과 물질, 사람으로 형성되어지는 네트워크 조차도.

이해와- 비판 없이 그저 대체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익명의(das Man)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고로, 나는 대체할 수 있는 인간에서 벗어나 실존하는 인간으로 고유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다.

내 실존에 대한 이해, 무지의 지, 정념, 순수실존인 시간에 대한,, 그 관념들, 즉 추상적 관념들 자체에 대한 이해와 정의 그리고 조합을 통해서 나의 삶에 대해 좀 더 진취적이고, 참여적인 행동(engagement) 을 통해, 본연의 자아, 즉, 대체할 수 없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그 길에 발을 디딜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새로운 길을 걷는 나는, 이 순간, 이 시점에서 다시 태어남과 동시에 연속된, 질적인 시간속에서 내 과거와 미래를 이해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참으로 고마운 철학이다.


'함께하는 혼자' 라는 말을 '다른 길 - 박노해 저' 에서 읽었을 때에는 어렴풋한 감성적, 정념적 인상만 존재 했다면, 이제는 아직도 내 무지한 이성을 통해 조금이나마 관념화 시킬 수 있다. 카뮈, 니체, 하이데거 같은 경우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초인, 즉, 자신의 존재 그리고 투기라는 '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부조리한 사회속에서 즉,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 속에서 인간의 긍정적이고, 의지적인 모습을 본연의 모습으로 가져야 한다고 했다. 또한, '신' 의 사랑, 가치, 도움에 기대하는 노예도덕으로 부터 벗어나고 스스로 해쳐 나가야 한다는 독립적 존재로서 실존을 이야기했다면,,

사르트르는 앙가주망(engagement) 을 통해 좀 더 혁명적, 공동체적 실존주의를 이야기하지 않았나 조심스레 유추 해 본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주장한 그는, 나의 실존적 선택은 '책임감'이 기반이된 자유를 향한 선택이고, 이 때 나의 실존을 결정함과 동시에 다른 이, 즉 세계에 대해서도 실존적 선택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나는 이 사유에 동의하며,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 실존적 선택 그리고 목적을 투기 하므로,  행동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내가 사유하고 있는 것이 견명원 첫번째 강의에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철학 한다' 라는 말이 아닐까 하며, 그것은 철학자들의 어깨에서 그 사유를 조금이나마 맛보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삶에 연결되도록 연결지점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


그렇다면 왜 실존 주의자 들은 왜 그렇게 '실존'을 강조 하였을까.

시대적 배경을 보면 수많은 전쟁과 기아 가난을 통해 인간의 탐욕의 끝없음 으로 발현된 사건들이 허무주의를 낳았고, 이성적 그리고, 합리적 주장들이 결코 해결 해 줄 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던져졌다. 이 부조리를 각각의 학자들은 죽음, 절망, 고통 등.. 각각의 개념으로 관념화 하였고, 이 속에서 인간의 존재, 실존이 소외당한 합리주의, 이성에 기반한 철학에 반기를 들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희망과 빛 그리고 살아가고자 하는 그 고귀한 이동(운동)을 설명하고, 전파하고자 애를썼다고 나는 이해하고있다.


그래서,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다' 라고 느끼는 순간이 '왜' 인지를 설명 해줄 수 있을거란 확신이 생겼다. 일단 르네상스, 근대철학자인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 파스칼이 기록한 수필을 읽고 싶다. 몽테뉴가 이야기한 이성과 경험 둘 다를 통해 아는 그리고, 나는 무엇을 아는가? 라는 끝 없는 근원적인 질문을 통해 아는 앎에 대한 욕구는 나를 살아있게 한다. 이 사실을 몰랐던 나는 죽어있던 인간, 부조리에 대한 이해가 없던 인간, 대체가능한 인간, 노예로서 삶을 살을 살았다고 나는 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겠다. 그렇다. 죽음을 이해하는 부조리를 이해하는 그래서 시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존재로서,, 나는 실존적 선택을 통해 살아갈 것이다.


이런 부조리의 세상 즉, 절망 고통 욕구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상황속에서 실존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내 안에 영원한 존재/영원한 이상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힘' 또는 '의지'가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잠재적 판단을 한다.

전에 크리스천 이었던 나는 아직까지 '사랑'의 가치 그리고 그것을 몸소 표현하고 전하신 예수님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신이라는 존재의 하나님. 부조리한 세상을 그저 손 놓고 바라만 보고 계시는 듯한 그 뜻이 무엇인지 대체 알 수 없으므로,, 나는 세상의 것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와 이해의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멈추는 순간 나는 죽기 때문이다. 왜냐면 내 존재가 없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살고싶다, 그러기에 사유하고, 소통하고 나아가 참여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에 나를 관여시키고 싶다.

이것이 '세계-내-존재' 로서 실존하는 존재로 살아있는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 '지금' 살고있다고 이야기 하겠다.


중요한 것은, 매일의 시간의 중요성과 그것을 허투루 보내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기는 나의 실존적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해로 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 생각 해 볼 수 있겠다. 지금 현재 내가 투기할 이 목적, 앞서 이야기 했던 '공동체적, 휴머니즘 실존주의' 의 삶. 나는 이것을 박노해 작가가 표현한 '함께하는 혼자' 대치 해 표현 할 수 있다고 정의 내리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동' 하는 존재. 결국, 내가 이해하고 정의 하였듯이, 부조리함은 나에게 던져지는 것이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그곳에 나는 '실존하는 존재' 로서 존재 할 것이고, 내가 해야 할 것은 '책임'이 기반이 된 '실존적 선택'을 하여 앙가주망(engagement)을 하는 것이다.

그 미래는 내가 정하고, 예측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내 삶을 포기(사유를 멈추고 실존적 존재이기를 포기하는 포기 곧 나에겐 죽음을 이야기함)하지 않고, 앙가주망을 함으로써 나는 죽어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때의 가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도덕적 가치..? 지금 현재로서 무지한 존재로서 얕은 이성과 경험으로 관념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인간을 관통하여 움직이게 하는 힘인 '사랑' 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랑' 에 무지 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내 이성적 한계와 경험을 통한 이해 뿐이니.

그래도, 단언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사랑에 의해 움직인다' 라는 것이다. 내 임계점에 도달 하였을 때, 발견 할 수 있었던 가치가 '사랑' 이었기 때문이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좀 더 연구하며 사유를 확장시켜 나가며, 비교 할 수 있는 대상들, 사건을 만나는 만남을 만나는 '공간'이 '미래' 라는 시간이 될 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나는 내일을 기대 할 수 있는 존재다. 미래를 살아있게 만드는 중심이 곧 내가 예측할 수 없고 조정할 수 도 없는 부조리한 '만남'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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